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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유감] 4세 고시 - 병든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세컨쉼터 2025. 5. 2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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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유치원 시대 – 조기교육 광풍이 한국 사회에 남긴 그림자

한 아이가 네 살에 고시생이 된다. 또 다른 아이는 일곱 살에 대입을 준비한다. 물론 진짜 고시나 입시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 못지않게 혹독하다. 사교육 시장에서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다. 조기입학 대비반, 유치원 논술, 초등 선행 심화과정, 유아 면접 코칭까지—이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일부 부모들에게는 상식처럼 소비된다. 문제는 이 조기경쟁의 광풍이 단순한 교육 열기를 넘어, 아이들의 정체성과 사회 전체의 건강성에 중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1. 왜 아이들이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가?
한국 교육은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서울대 맞춤형 로드맵’을 그리는 부모들이 있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교육 업체들이 있다. 유아기부터 진행되는 과도한 선행학습은 단순한 지적 자극을 넘어, 아이의 자율성과 놀이를 빼앗는다. 문제는 이 조기교육이 실질적인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발달심리학자 리처드 트렘블레이(Richard Tremblay)는 조기 인지학습이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사회성, 창의성, 문제해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2. 불안한 부모, 사교육 시장의 포로가 되다
4세 고시의 본질은 사실 ‘부모의 불안’이다. ‘남들 다 한다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면 뒤처지지 않을까?’라는 심리가 경쟁의 시동을 건다. 이러한 불안은 시장에서 즉각적으로 상품화된다. 조기영어, 영재 수학, 인터뷰 대비, 창의력 캠프 등은 ‘성공하는 아이의 필수 조건’으로 포장된다. 결과적으로 교육이 아닌,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장이 된다. 아이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투자 대비 수익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3.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공교육은 이 조기경쟁에서 거의 무력한 상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은 아이들의 발달 수준에 맞춰 자연스럽게 학습이 이뤄져야 함에도, 현실은 수업 내용이 너무 쉬워 부모들이 앞서서 ‘심화’를 찾게 되는 구조다. 즉, 공교육의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사교육이 들어선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흐름이 계층 간 격차를 더욱 벌려놓는다는 점이다. 고소득층은 ‘프리미엄 사교육’을 통해 앞서 나가고, 저소득층은 공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운명이 부모의 재력으로 결정되는 사회는 교육이 평등의 사다리라는 믿음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4. 존재가 아닌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배우기를 좋아하고, 스스로의 호기심으로 세계를 탐험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인위적으로 ‘설계’하고 ‘최적화’하려 한다. ‘4세 고시생’이라는 표현은 웃기면서도 슬프다. 그것은 아이가 인간이기 이전에 프로젝트로, 상품으로, 부모의 자아실현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는 ‘공부 잘하지만 불행한 아이들’이 양산된다.

5. 해법은 없는가? – 늦추는 용기, 신뢰의 재구축
이 문제의 핵심은 속도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을 너무 일찍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유아기는 인지보다 정서, 성적보다 자율이 중요한 시기다. 핀란드나 독일처럼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공식적인 학습을 거의 시키지 않는 교육철학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늦게 가도 괜찮다. 삶은 마라톤이다.” 이 메시지를 신뢰하는 사회가 결국 더 창의적이고 지속 가능한 인재를 배출한다.

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성장’이어야 한다
‘4세 고시’, ‘7세 고시’는 단순한 교육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불안, 경쟁, 계층 고착화, 부모의 조급함, 공교육의 무력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마음’의 총합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정보, 더 강한 훈련이 아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용기, 경쟁이 아닌 놀이와 탐색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믿고 지켜보는 어른들의 여유다. 결국, 교육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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