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상식] 피해자다움 -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2차 가해
피해자다움과 법원의 판결 :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2차 가해
"피해자다움"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회적 통념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법정에서도, 판결문에서도, 심지어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언어 속에서도 스며들어 있다. 피해자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사건 이후의 행동은 어땠는지, 피해 당시의 반응은 '상식적'이었는지—이런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가해 행위를 판단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판결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법정은 종종 피해자의 고통을 심판하는 자리로 전락하고, 가해자 처벌의 자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행실'을 평가하는 재판장이 되어 버린다.
실제 사례들을 보자.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사건 직후 친구와 카페에 가서 웃으며 대화했다는 이유로, 혹은 SNS에 평소처럼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피해자다움'을 의심받는 경우가 있다. 법원은 "피해자라고 보기 어려운 행동"이라는 표현을 판결문에 버젓이 적어 넣는다. 이는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 피해자는 반드시 침울하고, 두려워하며,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사건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진정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무언의 요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감정과 회복 과정을 극도로 단순화한 폭력적인 통념이다. 고통의 표현은 사람마다 다르고,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쓰며, 또 누군가는 애써 웃으면서 살아가려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반응은 정당하다. 법은 피해자의 감정 패턴을 재단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법은 그 개별성과 복합성을 존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 법원의 판결은 종종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않는 이유로 '피해자다움의 부재'를 꼽는다. 피해자가 사건 당시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 왜 즉각 신고하지 않았는지, 왜 시간이 지나서야 말했는지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이 또한 가해 행위의 본질과는 무관한 질문이다. 예컨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은 폭력의 권력 관계와 공포의 심리를 철저히 무시한 접근이다. 많은 경우 피해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얼어붙는다(freeze response). 이러한 심리학적 반응은 이미 많은 연구에서 입증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이를 쉽게 간과하거나 무시한다. 이런 식의 논리는 결국 피해자에게 "더 잘 싸웠어야지"라는 부당한 책임을 지운다. 법의 이름으로 2차 가해를 정당화하는 순간이다.
또한 법원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싸우거나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경우에도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의심한다. '너무 당당하다', '정상적인 피해자는 저렇지 않다'는 식의 비난이 이어진다. 피해자는 눈물을 흘려야 하고, 조용히 있어야 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야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법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다. 법은 오로지 사실과 증거를 판단해야 하며, 피해자의 성격이나 태도, 사건 이후의 일상생활과는 무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법정은 여전히 피해자의 행동과 감정을 평가하며, '피해자다움'이라는 신화를 기준으로 판결을 내린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나는 법원이 더 이상 피해자다움이라는 관념에 의존하지 않기를 강하게 주장한다. 법은 피해자의 증언을 의심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그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 피해자의 말은 단순한 참고자료가 아니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핵심적 단서다. 물론 증거와 절차의 공정성은 중요하지만, 그 공정성이 피해자의 상처를 재단하고 의심하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고통은 증명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사실이다.
법이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통을 재생산하는 기계일 뿐이다. 피해자다움이라는 잘못된 상상 속에서 법의 판결이 내려지는 현실을 끝내기 위해서는, 판사와 검찰, 변호사들이 피해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법정의 언어를 바꾸며, 무엇보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허상을 깨부수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 자각이야말로 법의 진정한 갱신의 출발점이다.